
군대에서는 누구나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후임 오면 정말 잘해줘야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막상 후임을 받게 되면 그러기가 힘들다. 영화를 보다보면 어리버리한 척 하는 것이 컨셉이라면서 후임관리 똑바로 하라고 말하는 고참이 있다. 어리버리함이 컨셉이라는 것은 실제로 그렇지 않지만 또 그렇기도 하다. 어리버리하다는 것이 뭘까? 군대에서는 상황 발생시 신속 정확한 처리를 할 수 있어야 하는데,누구라도 처음 접하는 것에 대해서는 판단이 확실치 않기 때문에 고민하는 만큼 행동이 느려지고 말도 버벅이게 된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이등병때는 어리버리할 수 밖에 없다.
어리버리하기 때문에 소위 갈굼을 당하는 것으로 군생활이 시작된다. 갈굼을 처음 경험하는 경우, 일종의 공포를 느끼게 되는데, 이런 공포가 지속되면 이성적인 판단을 건너뛰고 행동하게 된다.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따른다. 이것이 공포에 대한 반응이다. 갈굼의 효과는 상황 발생시 빠른 행동으로 나타나고, 어리버리함은 이제 그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없게 된다. 긴혹 입대 전부터 이런 상황에 대해 시뮬레이션을 해왔던 사람들에게는 어리버리한 시기가 매우 짧기도 하다. 그렇게 어리버리한 티를 벗고나면, 어느새 일병이 되어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어느덧 후임을 받게된다. 하지만, 진급됨에 따라 책임도 가중되는 곳이 군대고 후임관리를 못한다는 것은 다른 동기나 고참들에게 놀림감이 되기 마련이다. 지금껏 열심히 해온 군생활에 대해 일종의 보상심리가 생기기 때문에, 나름대로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중요해진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여지는지에 따라 대우도 틀려진다. (이것은 군대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대부분 처음에는 후임에게 정말 잘해준다. "내가 당한 것들을 물려주지 않을꺼야. 나는 그녀석 처럼은 하지 않을거야" 라면서... 과연 그게 잘되었는가?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이 틀리기 때문에, 그렇게 대해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녀석도 있기 마련이다.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여유가 있으면, 판단의 속도가 느리고 어리버리함이 지속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군복무기간이 10~20년 내내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2년안에 인수인계까지 마쳐야하기 때문에 그리 여유있지만도 않다.
때로는 그 후임이 무언가를 잘 못해서 다른 고참에게 갈굼을 받다 보면, 오히려 잘대해줬던 고참을 원망하기도 한다. 진작에 제대로 가르쳐줬다면 이렇게 까지 되지 않았을 텐데 너무 풀어줬던게 아니었냐면서 말이다. 어떤 후임은 자신은 애들 확실히 잡아서 군기를 잡겠다는 녀석도 있다. 주위의 다른 고참이나 동기들은
"저 녀석이 저러는게 다 니가 만만해 보여서 그러는 거야."라는둥
"니가 그러면 쟤가 뭘 보고 배우냐? 잘해줘봐야 너한테 좋을 것 하나도 없다."라는 말로 모욕감을 안겨준다. 이런 말들은 행동에 변화를 준다. 이런식으로 군대에서는 심리적으로 사람을 조정하는 법을 배운다. 대표적인 것이 다수가 자신에 의해 피해를 받는 듯한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때문에 피해를 보게 됨으로써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만큼 사람을 조종하는데 효과적인 방법이 있을까? 때로는 공포심을 조장하여 본능적인 자기방어를 발생시켜 따르게 하는 방법도 자주 사용된다.
지금은 장병복지가 상당히 잘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기본적인 욕구불만으로 인한 불상사는 많이 줄어들고 있다. 분위기도 상당히 바뀌어서 공포를 이용한 통제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계급이란 것이 존재하고 그 상황에서 무언가를 해야할 것을 강요받는다. 하지만, 지나친 소원수리로 고참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지고 이등병의 천국이라는 이야기도 여기저기서 종종 들리고, 주어진 권위에 비해 책임은 막중하다는 불평들도 많다. 분대장이라는 권한을 주었지만, 그것으로 얼차려를 부여한다는 것도 실제로는 치사하고 옹졸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아닌가? 권한은 주었지만 어떻게 해야 잘 쓸 수 있는지 방법은 알려주었는가? 반면에 누구나 인정하는 인격적으로도 존경스러운 고참이라면, 저런 치사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모두가 따른다. 역시 다수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나도 그래야 한다라는 심리의 작용으로 거스르기가 어렵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방법은 핵심을 이해했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럴 수 있는 정당한 위치에 이르기 까지 요구되는 것들과 해야할 것들이 많다. 군대에서는 참을인 어질인 사람인을 배운다고 하는데, 바로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고참이 되려면 거쳐야하는 과정에서 나온말이 아닐까? 가끔 고참들은 이런말을 한다. 예전이 더 군대다운 군대였고, 군생활하기 편했다고...
반면에 짧은 시간에 쉽게 인정을 받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길다면 길지만, 짧기도 한 2년이라는 세월동안 첫인상이 군생활의 절반은 좌우하는 것 같다. 거기에 카리스마가 넘치는 사람이 리더쉽가지 갖추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첫인상으로 1년은 그렇게 넘길 수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한계는 딱 1년이다. 소위 짬되는 고참이 되면서 부터 군생활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 시기가 지금껏 해온 군생활을 평가받는 시기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내가 관리하는 부대원들이 오합지졸이 된다면, 그것만큼 치욕적인 것이 없다. 또한, 이런 전환점이 있기 때문에 같은 내무실을 쓰지 않고 있거나 알게된지 1년이상 되지 않은 사람을 쉽게 믿고 의지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해 실망하게 되고 심하면 배신감 마저 느끼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서 무언가를 해야할 위치에 있고, 위에서 언급한 심리적인 영향을 받게 되면, 어느새 자신이 재평가 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처음 이등병때 생각했던 자신의 모습이 과연 올바른 것 이었을까? 이대로도 과연 좋은가? 내가 이렇게 해온 것이 올바른 행동이었을까? 심지어는 그토록 싫어했던 고참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을 맞이할 때도 있다. 나중에 가서는 어떤 것이 과연 옳은 것이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이르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자신의 스타일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어느 스타일이 옳은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자신의 스타일에 맞춰서 최대한 나쁘지 않은 방향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것으로도 괜찮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2년간의 짧은 군생활동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군대가 아닌 곳에서도 겪을 수도 있지만, 평생의 영향을 끼칠만한 경험을 2년간 집중적으로 접할 수 있는 곳은 없는 것 같다. 내가 겪은 비교적 요즈음의 군대는 공포의 대상과는 거리가 멀지만, 심리적인 갈굼의 강도는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한 것 같다. (부대 분위기나 사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요즘은 말년 병장이 그런 것을 견디지 못해서 이등병대신 작업나가는 실정이다. 겉으로는 많이 바뀌었지만, 실제로 그 속을 들여다 보면, 무엇이 바뀐 것일까? 그래서 아무리 군대가 편해졌어도 "군대는 역시 군대다" 라는 말이 있는 것은 아닐까? 단지 몸이 편한 곳이 되었을 뿐이다. 아마도 군생활만 생각하면 토나오는 것은 분명히 육체적인 고통때문 만은 아니다. 용서받지 못한자 라는 영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제의 군대의 특징들을 잘 담아낸 영화인 것 같다.
덧.
오늘 휴대용 병력동원 소집 안내서를 등기로 받았다. OTL